naer [신학] 칼바르트의 윤리사상
본문 바로가기
학문적인/신학과 철학

[신학] 칼바르트의 윤리사상

by Bethel of jacob 2020. 6. 13.
728x90

1. 칼바르트의 사상적 배경.

     로마서2판은 인간을 향하여 낙관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입장들을 뒤로 밀어두고 시간과 영원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 차이의 노력과 업적은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본다면 서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신학적 신념이 바울을 통하여 그에게 주어졌다. 

오직 하나님께서 열어 보이시는 계시를 통해서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이며, 계시 밖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시도들은 인간의 죄 된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타자성을 강조하던 바르트가 하나님의 인간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사상의 성숙이라 볼 수도 있고, 달리 보면 그의 첨예한 태도들이 보다 보편적인 지평으로 전환했다고도 볼 수 있다.

 

2.바르트의 신학적 출발점.

    바르트의 신학적 출발점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었다. 바르트는 신학과 현실 사이에 남겨지고 있는 커다란 괴리를 경험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바르트는 종교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을 구별하려고 한다.
 첫째, 하나님에 대한 내재적인 해석을 통하여 이루어진 인간적인 것의 고양이나 신격화에 가까운 신학적 낙관주의를 거절한다.
 둘째, 바르트가 선택한 신학적 방법은 일종의 변증법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무한과 유한의 변증법이며, 시간과 영원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이성과 계시의 변증법이다. 유한을 넘어설 수 있는 제3의 길이다. 제3의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긍정하는 것이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의 구조이다.
 셋째, 바르트의 신학적 출발점은 계시에 직면한 인간의 위기, 곧 절망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바르트의 신학의 출발점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을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의 선행과 윤리, 도덕은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차원에서의 기독교 윤리학적 논의란 타당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의 신학이 요구되는 말씀 안에서와 말씀 밖에서의 두 정황은 깊고 통찰력 있는 인간의 두 정황을 설명하는 원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 함의를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앙 고백적 인식과 체험이라고 말한다. 이성적인 방식에 앞서서 신앙적 관계가 먼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인간의 정황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신앙유비의 방법을 그의 신학적 논거의 기초로 삼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선행되어야 한다.

 

 3.바르트의 신학 안에서의 윤리학의 자리

     기독교 윤리학이 가능하려면 일단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신학이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의 현실을 나타내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인간의 현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인간을 향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을 안다. 윤리학이 행위론에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상황에 의존한다는 것이 바르트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바르트는 윤리학적 물음도 신론을 거쳐야만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믿었고, 인간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으며, 나아가 이 경우에서만 바른 삶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4. 바르트의 신학적 윤리

 가. 새로운 피조물의 윤리
    바르트의 윤리사상은 그의 신인식의 근거가 계시이듯이 인간의 자기이해도 계시에 의존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선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 아래 서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 부름을 받는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정인 의로워짐을 획득하고 새로워짐 속에서 인간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존재의 삶에 관한 학이 바르트에게 있어서 기독교 윤리이다.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을 듣는 사람 사이의 응답적 관계가 선행조건이 된다. 인간 행위가 선한 것이 되려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존재의 가능근거가 되어야한다.

 나. 윤리의 가능근거
    바르트는 윤리의 가능근거를 하나님에 두고 있다. 바르트는 성서가 지시하는 선의 근거는 오직 한 분이신 선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정의한다. 선의 근거는 당연히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이 선을 행할 길을 찾는다면 그것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야 하고,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선을 발견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 하나님의 선에 대하여 응답하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학은 하나님의 사랑과 명령에 대한 인식 근거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인식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책임적 응답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다. 화해의 특수윤리
    기독교 윤리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그러므로 특수한 윤리이다. 하나님과 화해란 존재로서의 인간은 즉자적으로 진정한 인간성 자체에 참여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객관적인 성취의 과제에 대한 인식 근거를 가진다.
기독교인의 실천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한,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더불어 존재하며 살아가고 행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바탕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학의 과제는 창조로부터 화해와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일어나는 윤리적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라. 만남의 현실과 윤리적 사건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거룩한 화해자와 신실함으로 인정받은 죄인, 거룩한 구속자이며 온전케 하시는 분과 하나님의 자녀간의 만남이다. 이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과 인간의 행위가 만난다. 만남의 윤리는 일종의 독특한 현실을 구성한다. 특별한 윤리로서 기독교 윤리학은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복종하는가 아니면 불복종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학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신학적으로 전제하는 화해의 근거를 가져야만, 기독교 윤리학일 수 있다. 계시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복종의 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객관적인 윤리학적 범주나, 규범 혹은 판단의 시금석들을 제시함 없이 바르트는 모든 구체적인 행위 속에서 자명하게 이해될 수 있는 하나님의 명령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윤리적 사건들은 하나님의 주장, 결정, 그리고 심판이며, 이런 측면에서 인간 행위에서의 선과 악은 언제나 계시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마. 인간의 자유와 책임

    바르트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아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동시에 책임적인 존재가 되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자유는 인간 자신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인간을 자유에 대하여 책임적인 존재로 부르는 자유이다. 이 자유 속에서 인간은 참된 하나님을 만나며, 참된 자신을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바르트의 윤리학은 구체적인 판단 범주를 제시하기보다 포괄적이며 대단히 형식적인 원리이다. 특별한 윤리학으로서의 기독교 윤리학은 신학적 이해 근거를 지닌다고 볼 수 있으나, 신학적 사회윤리학적 원리를 획득하기 위해서 새롭게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바. 바르트의 사회 윤리학적 원리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중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 그 행위가 정치적 혹은 사회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행위의 내면적 동기와 방향은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앙 고백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바르트는 나치의 거짓과 불의한 현실에 직면하면서 교회와 정치적 관계에 대하여 

12가지 항목으로 설명하였다.
1) 교회는 추상적인 요인들보다는 구체적인 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
2)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증인으로서 사명을 가져야 한다.
3) 교회는 낮은 자와 약한 자들을 위한 연대에 힘써야 하며, 언제나 정치적 영역에서는 사회 정의를 위해 견고히 서 있어야 한다.
4) 교회는 정치적 이유에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유예하는 독재에 참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대해야 한다.
5) 국가의 권위는 기본적인 사회 책무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 없다.
6) 교회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자유와 권리를 옹호해야만 한다.
7) 교회는 영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 사이에 있는 다른 기능에 대하여 민감하게 구별해야 한다.
8) 국교회는 가의 모든 비밀정책과 비밀스런 외교적 협약에 대하여 적대적인 입장에 선다.
9) 교회는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모든 형태의 법제화, 조정, 감시를 거절한다.
10) 기본적으로 섬김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모든 지배를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
11) 교회는 그 기원에 있어서 보편적이므로 정치 영역에 있어서 모든 형태의 추상적인 지역성, 지엽성, 그리고 국가적인 이익에 대하여 저항한다.
12) 정치권력은 반드시 교회의 승인과 지지를 받아야 한다.

이 유비를 구성하고 있는 원리는 바로 칼빈의 정치 신학적 전제들이라고 보여지는데,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비밀을 담지하고 있는 교회가 사회질서의 원형을 담고 있는 인식론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르트는 세 가지 점에서 분명한 그의 사회윤리의 한계를 긋고 있다.
첫째, 교회는 기능적으로 다르지만 정치적 행위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
둘째, 교회의 정치참여는 신앙 고백적이어야 한다는 것.
셋째, 교회의 정치참여는 가난하고 약자들을 섬기되 그 섬기는 원리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지평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5. 나가는 말

    바르트의 공헌은 그가 정통주의 신학의 재현을 위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틀을 형성하는데 이바지했지만, 정통주의 신학이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경직된 규범 속에 가두고 율법주의에 빠졌던 오류를 시정하고 하나님 말씀의 자유,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윤리의 형식적 범주만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적 결단과 행위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상황윤리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점이다.

 바르트의 기독교 윤리학은 신학적 윤리학으로서 형식원리로서의 타당성을 가지지만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에 접근해 나가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바르트는 그의 특유의 신앙유비(analogia fides)를 중요한 방법론으로 사용하는데 문제는 그 임의성에 대한 의혹이 남는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견해는 교회에 비하여 미성숙한 사회가 성직자들의 후견을 받아야 한다는 그리스도 주권론의 한 양태이다. 여기서 이해되는 그리스도는 우주적인 지배자이지만 성서가 증거 하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려오는 현실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취할 행위는 신앙 고백적이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바르트의 입장은 세속적 주권과 그리스도의 주권 사이에서 양자의 요구를 받고 있는 다원적 상황을 전제하지 않은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기독교인들의 행위론을 다루는 교의학적 윤리학을 전개한다. 기독교인의 행위는 선과 악에 대한 판단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수납 가능성으로서의 하나님과의 만남과 화해를 통하여 들려오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복종여하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하나님 명령의 자명성 자체도 계시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므로 철저히 신학적 명제 안에 윤리학이 귀속되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는 내용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정작 무엇인가는 규범적이기 보다는 상황적이며 명시적이기보다는 포괄적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윤리 사상은 결과적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윤리학을 요구하고 있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