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포기될 수 없는 인간의 갈망이다. 인간의 변화는 가능할까?"
인간의 변화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예레미야 13장 23절
"에티오피아 사람이 피부 색깔을 바꿀 수 있겠느냐?, 표범이 그 얼룩을 바꿀 수 있겠느냐?
만약 바꿀 수 있다면 언제나 악한 일만 하는 너희도 착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변화의 비관적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변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변할 수 있다.
어떻게?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새사람을 입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은, 변화되기 위해서 옛사람이 뭔지 알아야 한다.
옛사람은 누구인가?
"마음이 허망한 사람, 총명이 어두운 사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허망한 사람은 결과가 없는 헛된 것이며, 몸부림치지만 값이 없는 것을 말한다.
영어로는 vanity(허영심), futility(헛된 무가치).라고 쓰여있다.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헛된 것'에 대해 목을 메고 있다.
추구하고 있는 것들이 후회없는 열매라고 생각하는가?
인생의 끝자락에서 "왜 헛된 것에 목을 매고 살아왔을까?"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믿지 않는 사람 중에서도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은 많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어두운 상태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예를 들어 호킹박사는 우주천문학자로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영적으로는 어두운 사람이다.
똑똑한 사람이 왜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거나 무지할까?
그 예를 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수님 시대에 최고의 지혜자였던 니고데모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볼 수도 없다'고 하였다.
니고데모는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라는 말입니까?" 묻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 못한 것은 영적으로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이 원인에 대해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적으로 죽은 것은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모르고 희망없이 살던 사람들의 모습은 이 땅의 기준에 맞춰서 살고 있는 자포자기 한 사람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새사람은 누구인가? 새사람은 무엇인가?
바울은 변화된 사람의 본질을 한마디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새로운 생명이 주어진다.
그때 우리가 새사람이 되는 것이고 새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인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변화의 시작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바마도 대통령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화되는 것이라고 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이 변화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예수를 믿으면 그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 변화가 계속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학문적인 > 교재와 교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별금지법을 왜 반대하는가? (1) | 2020.08.18 |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관하여.. (0) | 2020.08.05 |
댓글